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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희씨 이야기/삶의 향기

오월愛, 못다한 오월의 이야기 …우린 잘 살고 있나요?

수희씨 2011. 6. 15. 10:57
나에게 오월 광주는 큰 의미가 없다. 
중학교 때인지 고등학교  시절이었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감쳐둔 비디오를 몰래 훔쳐본 기억이 있다.
나는 야한 비디오일거라 예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날의 화면은 어두운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봐도 도저히 무서워서 끝까지 볼 수 없는 폭력적인 장면이 넘쳐났다. 그렇게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알았다. 비디오을 본 당시에도 실은 잘 몰랐다. 아버지는 몰라도 된다고만 하셨다. 아니 어떻게 군인들이 시민들을 때리고, 총을 쏠 수 있는지...한동안 큰 충격에서 벗어나질 못했다는 것만 기억한다.


그리고 살면서 가끔 5.18을 다룬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고, 대학시절 친구와 망월동을 다녀온 게 전부라면 전부다. 나는 5.18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제대로 분노도 하지 못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벌써 30년전의 일이다. 가끔 기념식이 열렸다, 망월동에 가자, 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또 잊고 지냈다. 이제 민주화운동으로 바로 잡혔고, 보상도 이뤄졌으니...이렇게 상처는 아무나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어제 본 영화 <오월애>는 광주의 아픔을  30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함을 알게 해줬다. 영화는 당시 시민군들의 회고를 통해 당시의 상황과 현재의 삶을 보여줬다.

"쓰잘데 없는 이야길 왜 하라 하느냐" 
"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했을겁니다" 
" 밥은 먹었냐라며 따뜻하게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따라갔다"
"광주 사람인게 얼마나 뿌듯한지 모른다"
" 우리가 여기서 함께 죽자고 맹세를 하고 유서를 썼다" 
" 내 자식이 도청 별관서 죽었는데, 그걸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 남편이 그런 걸 한 줄도 몰랐다. 아마 나라도 그렇게 했을거다. 난 충분히 이해한다"
" 먼저 도청을 나왔다는 죄책감에 평생을 미안해하며 살고 있다"
" 나보다도 더 어린 여고생들이 밥을 하고 있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 그때 제일 먼저 광주를 빠져나간 사람들은 가진 자들이었다"
"나는 이념도 사상도 아무것도 모른다. 그저 내가족을, 광주시민을 지키고 싶었다"
"  사람들은 보상받았으니 되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아니다. 돈으로는 보상할 수 없다. 여전히 아프다"
" 오월이 얼른 지나갔으면 좋겠다"
"오월만 되면 온몸이 긴장하고 뻣뻣해진다"

영화 <오월애> 사람들이 한 말이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흘렀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억에만, 삶 속에만 오월 광주 이야기가 자리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를 기념하는 세상에서 여전히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그렇게 힘들게 지켰던 민주주의는 얼마나 성장했는지 하는 의문을 갖는다.

평범했던 사람들, 그들이 말하는 오월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한다. 정말 잘 살고 있는지를......

    <오월애는 김태일 감독의 가족이 모두 제작에 나섰단다. 아내 주로미씨는 조연출을, 아들 상구씨는 보조촬영을 맡았다 한다. 아들 상구씨의 작업일지 모습이 있어 퍼왔다.
출처 : 오월애 블로그 http://blog.naver.com/nonamest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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