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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술을 마시고 싶던 날, 술 마시는 ‘시인’을 만났다 본문

수희씨 이야기/책읽기

낮술을 마시고 싶던 날, 술 마시는 ‘시인’을 만났다

수희씨 2013. 9. 23. 12:07

마침 그날은 홍상수 영화 <우리 선희>를 봤던 날이다. 혼자 대낮에 극장가서 영화를 봤다. 홍상수 영화는 꼭 보고 싶은데 같이 갈 사람도 마땅치 않고, 영화도 아무데서나 하지 않기에 가장 편한 방법은 혼자서 가는 것이다. 홍상수 영화는 내 식대로 쉽게 표현해 본다면 남자들이 얼마나 찌질한가에 대한 이야기다. 처음엔 짜증이 났더랬다. 뭐 이렇게 맨날 술을 먹나, 여자랑 한 번 자보고 싶어서 개수작들인가, 라는 생각만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홍상수 영화는 참 재미났다. 그 찌질함을 확인하는 게 좋았고, 그들이 낮부터 술을 마시며 하는 쓸데없는(?) 이야기들에도 픽픽 웃움이 났다. 게다가 남녀 사이에 생각이 차이가 쾌 크다는 걸 홍상수처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얘기도 드물었다. 나는 (내가 남자도 아닌데?!) 홍상수 영화를 보면 낮부터 소주를 마시며 어여쁜 여자를 꼬셔보고 싶은 생각도 나고, 시시껄렁한 이야길 누군가 낮부터 밤까지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게 홍상수 영화 효과는 이런 것이다.



그날 홍상수 영화를 보고 와서 마음이 들떠 있었던 저녁, 남편이 시집을 샀다며 시를 읽어주겠노라 했다. 평소 시집을 즐겨 읽는 남편이 아니기에 도대체 어떤 시인이기에 그의 마음을 훔쳤나 싶어 귀를 열었다. 남편이 읽어준 시는 류근 시인이 쓴 <유부남>이란 시였다. 남편은 시를 읽어내면서도 낄낄거림을 참지 못하는 눈치였고, 난 유부남이라는 시의 화자가 마치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어떤 찌질남 같아서 흠칫 놀랐다. 아니 류근 시인라니? 묻자 남편은 말했다. “얼마 전 TV를 봤는데 이 시인이 나왔어. 말을 참 잘하더라구. 그래서 류근 시인의 시집과 산문집을 샀지.” 남편이 시집 <상처적 체질>과 함께 내민 산문집은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였다. 책 날개를 펴보니 충주에서 자랐다는 문구에 반가움이 또 일었다. 그날 밤 남편은 시집을 읽고, 난 산문집을 읽었다.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는 한 시인이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엿볼 수 있는 그의 일상을 담아낸 책이다. 류근 시인은 페이스북도 하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페이스북에 썼던 글을 묶은 책인 듯싶다. 류근 시인의 일상은 이다. 술 안 마실 때만 골라 쓰느라 18년만에 시집을 냈다하니 그가 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겠다. 이 책은 마치 그가 술 마신 이야기, 술에서 깨지 못한 숙취 때문에 태어난 듯하다.

그는 오히려 술에서 깨는 것을 두려워 하는 듯 하다. 술 멈추고 맨정신 돌아오면 낯선 행성에 팽겨쳐진 기분이라며 우울하고 참혹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또 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두고는 나는 왜 이토록 술에서 깨어나지 않는 것인가. 숙취를 지병처럼 사랑하는 것인가. 또 술의 사람의 되고 싶은가라는 한탄을 쏟아낸다. 시인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술을 마셨다. 그는 술자리에서 한 잔 권하지 않은 사람은 인연을 제대로 맞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시인은 비가 오는 날은 비의 사람과, 바람이 부는 날은 바람의 사람과, 꽃이 피는 날은 꽃의 사람과, 햇살이 눈물 나게 좋은 날엔 햇살의 사람과 술을 마셨다. 심지어는 아무도 술 마시지 않는 엄숙한 식사 모임 같은 데서도 나는 뻔뻔히 혼자 술을 시켜놓고 독작을 했다. 그게 내게 세상의 모든 관계들에게 베푸는 악수법이었다. 나는 맨정신일 때 잘 웃지 못하는 사람이었다이러니 이 시인이 술을 얼마나 마셔대는지 짐작하긴 어렵지 않다. 마시면 더 외로워지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마신다.

시인은 시인이라는 자존심 하나로 가난을 버텨내가며 술을 마시며 하루하루 사는 듯 하다. 그는 아침부터 울고 싶은 날이 많고, 낮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날들이 많다, 슬픈 날은 김수영을 읽고, 좀 견딜만한 날은 백석을 읽는단다. 빗소리를 견뎌내며 애인들에게 편지도 쓸 줄 아는 사람이다. 옛날 애인들에게 수없이 편지를 쓰지만 답장 한번 받지 못하는 눈치다

세상의 눈으로 보자면 그는 술 마시고 괴로워하는 찌질한(?) 백수에 더 가깝다. 그렇지만 시인은 다르다. 그가 술에 취해서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바.”하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가 술에 취해 세상에 내뱉는 말들은 세상에 대한 조롱이다.

이 책 표지 제목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 위에는 작은 글씨로 외롭고 슬프고 고단한 그대에게라고 씌어있다. 말 그대로 시인 자신을 위한 이야기가 아닌 듯 싶다. 하루 종일 라면만 먹은 날이 숱하게 많고, 남이 사주는 술은 조낸 가르치고 싶어하니까먹을 수 없고, 돈이 없어도 외상술이라도 먹어야 할 만큼 외로운 날들이 많고, 술이라도 먹어야 웃을 수 있는 사람이니 얼마나 슬프겠는가

류근 시인은 자신을 삼류 트로트 통속 야매 연애 시인이라고 말한다. 시집과 산문집이 꽤 많이 팔렸다하니 이제 돈 걱정 없이 술을 마실까. TV에까지 나와 연애 이야길 했으니 그의 삶은 더 나아질까. 이번 추석엔 라면 말고 송편 좀 얻어먹었나그의 책을 읽으며 그의 안부를 묻고 싶어졌다.

, 류근 시인도 홍상수 영화에 대해 한마디 했다. 여자와 홍상수 영화를 보는 일은 삼가야 한다고. 자기가 써먹을 수 있는 온갖 찌질한 작업 멘트들이 다 완비돼 있어 자괴스럽고 열등감 돋는다고. 홍상수 영화를 본 여자에게 자칫 어설픈 멘트를 날렸다간 그 당장에 아류 찌질이로 인이 쳐져 휴거되기 십상이라며 연애에 해로우니 홍상수를 피해야 한다고 말이다

난 홍상수 영화를 좋아하는 여자이니 찌질한 시인과 술자리에서 만날 일은 없을 듯싶다. 이래저래 다시 낮술이 생각난다. 시바. (시인은 문장 끝마다 시바를 부쳤다. 나도 따라 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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